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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교회 찬양/설교 말씀

12월 주일예배 설교

by 힐링칠봉2 202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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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주일예배 설교


제목: 요한복음 10장 1~9절 목자, 양의문 (3부)

염소가 왜 고집을 부리고, 주인을 뿔로 들이 박으려고 하냐하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사회에서 출교를 당한 맹인을찾아가 만나시면서 하신말씀이 오늘본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염소로 표현 그들의 정체는 맹인이 눈을 뜬 이야기를 다룬 9장 전체에서 소개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식층들 이었습니다. 또한 사회의 기득권층 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종교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지위가 있고 세상의 위치도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목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스스로 인생길을 헤쳐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나의 노력만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죽음과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주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 없으니 주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철썩같이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철썩같이 믿고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헤쳐갈수 없고, 우리의 노력만으로 먹고 살 수 없고, 생명의 문제를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자를 따르면 목자가 책임을 집니다. 그 목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로 소개하면서 동시에 본문에 보면 “양의 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7~9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는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은 말 그대로 양들이 다니는 문입니다. 이스라엘 유목민들은 야외에서 이동하다 밤이되면 간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 우리를 만들어 놓고 한쪽에 양들의 통로를 만들고는 양을 모두 집어 넣습니다. 마지막 양이 들어가면 목자는 문을 만들지 않고 그 문 앞에서 자면서 밤을 보냅니다.  목자가 문이 없는 우리앞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밤에 도둑과 맹수들의 공격을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의문입니다. 여러분 목자가 양의 문이된다는 것은 양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우리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 책임지시기 위해 목자로, 양의 문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양같아서 자주 길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양같아서 주님앞에 자꾸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때론 하지 말아야할 일들도 합니다. 그런데 양의 문이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그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목숨으로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목자요, 양의문이신 예수님입니다. 

 



제가 혼자 있는 것 같고, 나만 세상으로부터 돌맹이른 맞는 것 같을 때 우연히 아주 짧은 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영상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  강원도 태백에 가면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예수원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예수원에 간 한 성도가 그곳에 있는 양의 털을 깍는 노동을 하다 깨달은 것을 기록한 신앙고백을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드디어 양털깍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말로만 듣던 양을 직접 대하고 더욱이 양털까지 깍게 되니 시편23편을 즐겨 묵상하던 나의 기대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양털을 깎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못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양들이 느닷없이 뛰며 소동을 피우는가 하면,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트림을 하기도 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오줌과 똥을 싸기도 했다. 특히 엉덩이 부분을 손질할 때엔 지저분함과 추한 냄새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털에 배어 있는 고약한 냄새와 더러운 기름기가 온통 그대로 나의 옷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얼마나 머리가 지끈거리던지, 양털 ㄲR는 일로는 절대로 예수원에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1주일동안 양털 깎기가 끝나던 토요일 저녁, 내 마음속에는 전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양털 깎는 일이 내게는 그토록 고통스러웠지만 그 목장의 목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역겨운 냄새나 더러움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는 모습이었어. 정말 태연히, 기쁘게 일하고들 있었어. 양을 스스럼없이 쓰다듬어 주거나,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하며, 내가 그토록 역겨워했던 부위를 다정하게 손질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나와 목자들 사이에 다른점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아! 그래, 그거로구나, 목자들은 양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게는 더럽고 역겨웠던 것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거야!

 


 

이런 생각과 함께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양들과 다를바가 없어. 아니 바로 내가 양이야. 더럽고 역겨운 냄새나 풍기면서 얼마나 목자를 성가시게 했던가? 그렇지만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모든 더러움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품어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지켜 주시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예수님의 목자 되심의 의미가 얼마나 뜻 깊어지는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시편 23편이 얼마나 멋지게 여겨지는지 나는 다시한번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출처 경안교회 담임목사 고원영

ⓒ ddzphoto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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